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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은정의 흐릿한 그림 hazy painting
평론

관심 없었던 이야기 - 이은정 작가의 종부여행 / 2창수

by 다우징 2015. 1. 20.

관심 없었던 이야기 - 이은정 작가의 종부여행

 
2창수 (화가)


다가온 일에 순응하며 묵묵히 살았던 인생이 있다.

일제에 의해 강탈되었던 국토가 해방되었고 고향을 정비하며 살아보려 했을 때 또 다른 전쟁으로 인하여 고향을 등지며 떠돌게 되었다. 전쟁 후 새벽종과 함께 시작하는 새마을 운동과 세상의 빠른 속도로 인해 고립되고 자식에게 자신의 일을 주지 못하고 내 생애 동안만 내가 책임지려는 불운한 시대를 살았던 여인들이 있다. 나의 선택은 아니지만 나의 의무라 여기며 아이의 출산양육과 가정의 대소사를 책임지며 살았다. 모든 여인들이 가진 일이지만 큰며느리에게는 좀 더 다른 중요함이 수반 되었던 일이다.

이은정 화가는 오래 전부터 여인들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호적을 등재하는 방식이 남성중심으로 하다 보니 유전적 형질은 대를 이어 남기고 있지만 성씨는 여인으로 살면서 남기기 힘들다. 자신이 죽으면 기록으로 남는 것은 별로 없고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다들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어쩐지 아쉽다.

휴~ 하는 이런 아쉬움을 뒤로 한 체 무작정 한탄을 하기엔 아직 젊은 관계로 이은정은 어머니들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대표적인 여인들을 추적하는 것이 나을 듯 했고 그러기 위해 충북에 산재되어 있는 종부들을 찾기 시작했다.

종부탐방
문명이 원시시대와 비교될 수도 없을 만큼 휘황찬란하게 바뀌었다. 인공위성이 날아다니고 달에 발 도장을 찍은 지도 40년이 넘은 오늘날 습관과 다를 바 없는 종부들의 역할에 궁금증이 생겼기도 했다. 새로운 곳을 찾아간다는 마냥 즐거운 호기심이 생겼고 2009년 봄, 여름, 가을을 느껴보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계절을 충분히 느끼며 즐거운 취재를 다녔다. 다소 늦은
감상의 기행문이지만 2009년의 냄새가 아련히 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느린 자동차를 타고 (체감 속도는 빠르다) 무작정 공군 사관학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주 한씨가 이 지역에서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방서 사거리를 찾고 있었다. 청주 관광 안내도를 가지고 거리 표지판에 쓰여 있는 모든 글을 읽으며 방서 사거리를 찾아 해매고 있었다. 우리는 원시시대와 다른 시대에 살고 있었지만 축약된 관광지도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길 찾는 수준은 글을 아는 원시인 수준이었다. 몇 차례 공군 사관학교와 듣기 거북한 이름의 대머리 공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던 중 왼편에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 동물적 본능에 핸들을 돌렸다. 그러나 없었다. 운전 중 몇 차례의 핍박과 멸시를 당한 후 근처에 있던 경로당에서 도움을 구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경로당은 조용하고 깨끗했다. 할머니 한분이 조용한 가운데 소리 없이 다가오시더니 우리의 질문에 밀양 손씨 종가가 근처에 있다고 가르쳐 주셨다. 스르르 움직이시는 세상에 거스를 것이 없는 듯한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목침에 다려진 듯한 눌린 머리카락이 탁탁~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에 가볍게 움직였다.
그렇게 만난 밀양손씨(密陽孫氏) 역승공파(驛丞公波)의 16대 종부 김필순(89), 그녀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인사를 드려도 인기척이 없고 커다란 대문과 개 짖는 소리에 다가가지 못했지만 옆집 길마당에서 모여 계신 동네 할머니들이 도와주셔서 동네 할머니 손에 이끌려 종가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괜찮어. 그냥 밀고 들어가면 돼.” 우리를 이끌고 집안으로 들어 가셨지만 우리의 신분은 아직 정리가 되지 못한 얼뜨기 조사원이었고 처음 해봐야 하는 일이라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어정정히 따라 들어갔다. 몸이 뻣뻣했다.


집이 규모가 크고 안쪽에 집과 안뜰이 있고 바깥으로 사랑채가 있었기에 소리가 안 들렸던 것 같았다. 집의 구조가 ‘ ’자 형태로 되어 있었는데 사랑채가 ‘ㅡ’ 자 모양으로 아래쪽에 창고가 ‘ l ’ 자모양으로 동쪽에 있어서 전반적으로 떨어져 있는’ㅁ’모양이었다. 그리고 대문이 별도로 되어있는 집이었다. 그러니 대문에서“이리 오너라”하고 말을 하여도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들어와서 알았지만 옆집이 똑같이 생긴 것을 보고 의야 해 했는데 원래 옆집과 한 집이였지만 무슨 이유에서 인지 나뉘게 되었다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듣기는 했지만 무슨 이야기 인지 정리가 되지 않아서였다. 두 집을 합하면 40~50칸 정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불행이도 현재는 고택의 원형을 유추해 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경상도나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은 곳에서는 원형이 잘 유지되곤 하나 이렇게 도심 근처에서 원형이 잘 유지되기는 힘든 것 같다. 올라가는 부동산의 유혹을 옛 집이 막기에는 역부족인가보다. 안방과 대청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고 안방의 뒷문을 열어 뒤뜰의 풀들이 소소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바람이 냉방의 역할을 충실히 잘 해주고 있었다.

밀양손씨 역승공파 16대 종부께서는 연세가 많으셔서 거동이 불편하셨지만 낯선 우리들을 반갑게 맞아 주셨다. 하얗고 짧은 머리와 주름 그리고 차분한 움직임이 김할머니의 인생을 말하고 있었다. 반들반들한 대청마루에 앉아 계셨는데 니스를 열 번은 족히 바른 듯 투명한 광택이 두툼해 보였다. 우리를 보고 이전에도 촬영을 많이 해가고 또 취재도 여러 번 한적이 있다고 하셨다. 사전 인터뷰를 연락드리고 찾아오는 것이 예의지만 이렇듯 불쑥 찾아온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할 틈도 없이 할머니의 이야기 봇다리는 이미 풀려 있었다. 손주들에게 말씀하시듯 너무 자연스러웠다.
청원군 북일면에서 24살에 시집을 왔고 5남매 (딸3, 아들2)를 두셨다. 종부와는 다소 어울리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요즘 종부들의 모습이 이와 같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로 인해 종부에 대한 우리의 고정 관념을 먼저 수정할 필요를 느꼈다. 내가 가진 종부의 모습은 한복을 입고 머리에 쪽을 두른 할머니였으니 21세기에 19세기를 만나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관념이었다. 여지없이 깨진 것은 물론이다.

24살에 시집을 오셨으면 노처녀였을 텐데 어떻게 종가집으로 시집을 오게 된 것이 궁금했다. 혼기가 늦은 것은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했고 또 잘했기 때문에 회사에서 놓아 주지 않아서란다. 할머니의 두 아들은 둘 다 고위 공무원을 지냈다고 한다. 그 외에 다양한 아이들과 자식에 대한 끊임없는 즐거움을 이야기하셨지만 잘 정리가 되지 못했다.
고택은 6.25 전란 중에도 큰 피해 없이 보전이 되었다. 인민군들이 내려온다고 해서 피난을 갈 곳도 없고 해서 몇일을 버티다가 아무래도 피난을 가야 할 것 같아 피난을 떠났는데 가족과 머슴들이 24~7명 정도였다. 대 식구가 피난을 떠났으니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이리저리 해매다 곧 돌아왔는데 집이 멀쩡해서 좋아했다. 인민군이 청주를 점령했을 때 이 집과 옆집을 사령부와 야전병원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곳간에 든 식량 등 물건들은 아무것도 남지 않고 덩그러니 집만 남았다. 그 집이 오늘까지 내려오는 그 집이였다. 설명을 듣고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보는데 인민군의 흔적은 없었다.

할머니는 청주여고 3회 졸업생이며, 예전에 꿈이 비행기 조종사였다고 한다. 그리고 할머니는 조종사의 꿈을 이루고 싶어 했다. 그때는 일제시대였기 때문에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일본에 뺏길까봐 항상 걱정하셨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항공사의 꿈을 꾸었고 항공 학교 시험에 등록을 하였나 보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날 어머니가 아니었기에 시험 당일 옷을 숨겨 놓아서 시험을 못 치르게 하였다고 한다. 옷이 숨겨져 이루지는 못했지만 지금의 그녀에게선 세월을 초월한 인생에 대한 도전의 모습이 아직도 나오는 것 같았다.

몇 차례 시행착오 끝에 종부들과의 만남에 일정한 패턴이 생기기 시작했고 좀 더 그녀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7월의 뜨거운 열기를 자동차 에어컨으로 누르며 다른 행선지로 이동하고 있었다. 뜨거움은 차 지붕을 타고 스믈스믈 내려오고 있었지만 에어컨 바람으로 위로 밀어 올리며 달리고 있었다. 체감 속도가 여전히 빠른 우리 차는 충북 음성군 원남면에 있는 제주고씨 상당군파의 집성촌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제주고씨 집성촌에서 이장님에게 수소문 끝에 종가집이 두 마을 너머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구불구불 리듬에 맞추어 흔들리는 길을 따라 당도했다. 여느 시골 마을과 다름이 없는 장소에서 여느 시골 할머니께서 집안일을 하시고 계셨다. 제주고씨 상당군파 28대 종부 평강전씨(84)였다. 17세에 시집오셔서 여지껏 그 곳에 계셨다고 한다.
지금은 새 집에 계시지만 20m정도 떨어진 곳에 과거에 살고 계셨던 집이 그을음이 묻어있는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몇해전 불에 그을려 새로 집을 지어 이사를 오셨다고 한다. 이사라도 하기 뭐한 옆집이긴 했지만 손님들이 많을 땐 그을린 집을 아직도 쓰곤 한단다.

17세에 시집을 오셨는데 일제시대에 젊은 여자들을 일본에서 색출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 화를 피하기 위해 얼굴도 못 보고 급하게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 바랑골로 시집을 오게 된 것이었다. 종가로 시집을 온 것이 아니었고 차남에게 시집을 왔다. 곧 임신을 했고 아이를 낳자마자 아들 장남에게 아이를 빼앗겼다한다. 큰 집에 절손이 되어서 특별한 설명도 없이 본인의 아이로 장손을 삼았다. 그렇게 떠나보낸 첫아이도 40대에 사고로 운명을 마쳤다. 그리고 지금 종손인 손자가 고등학생이라 했다. 서울에 살고 있는데 좋은 아가씨 소개시켜달라고 하신다. 전쟁과 난리 통에 장손 집의 사람들은 다 돌아가셔서 동내 분들의 설명에 의하면 그녀가 제사도 모시는 실질적 종부라고 하셨다.

족보를 보여주시며 상당군파의 역사를 설명해 주시는데 28대째 첫째 줄로 내려오는 대 종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족보 볼 때마다 항상 이리저리 책장을 넘기느라 바빴지만 할머니의 족보는 너무 간편했다. 한 페이지만 보고 있으면 정리가 끝났다. 마을의 오래된 족보 제사기구나 문서 등은 지방을 돌아다니는 좀도둑에 의해 모두 없어졌다. 남의 족보 가져가서 뭐하려 하는지 하시며 혀를 차신다. 그러면서 나를 왜 보시는지 모르겠다. 쨍쨍거리며 떠있는 햇살 사이로 뒷산에 높게 솟은 은행나무가 보였다. 지방 자연유산으로 등재되는 중이라고 하시며 자랑스러워하신다.
제주고씨의 집성촌은 바랑골이라는 특이한 지명으로 불리 운다. 바랑골은 향정이라고도 하며 이 곳에는 수백년 묵은 은행나무 정자가 있어 행정(杏은행)으로 부르던 것이 향정으로 변한 것이며 지금은 바랑골로 부르고 있다. 이는 마을 뒷산이 용머리 형상으로 용머리가 마을 골짝을 바라보고 있다하여 바룡골이라 하였던 것이 바랑골로 변하였다라고도 하며 또는 북쪽과 서쪽으로 둘러싸여 추운 겨울에도 아늑하고 추운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에 바람이 불지 않는 골짝의 마을이라하여 바랑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특별한 일이 별로 없는 7월의 어느 날 우리의 방문이 내심 반가우셨는지 우리의 목적지에 관심을 보이신다. 할머니는 유일한 친구인 짖지도 않고 낑낑 바둥거리는 강아지를 보고 “심심해서 짖는 강아지 샀더니 벙어리 강아지로 샀네” 라며 우리를 조용히 보내는 강아지를 나무라시며 우리와의 이별을 아쉬워하셨다.

우리의 지명은 그 곳 거주민들의 편의나 바램이 깃들여있다. 종부의 삶 역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어떤 방식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다. 이 글에는 두 명 종부의 역사를 기록했지만 다른 종부의 역사는 지면의 관계상 생략했다. 그러나 본인의 원하는 삶보다는 남을 위한 삶에 그녀들은 삶을 바쳤고 자신과 같은 삶을 며느리에게 주고 싶지 않아한다는 공통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의 고귀함 멋 운치 등은 우리가 쉽게 평가하는 구경거리이다. 우리들의 고정관념을 지켜주기 위해 몸소하는 노력은 힘이 들고 지친다. 우리는 그들이 오랜 시간동안 변화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오늘 일이 내일 또 내일 반복되는 일을 종부는 계속 수행해야 했다.
대다수 종부들은 자신의 집안을 자랑스러워하고 혹 취재 온 우리에게 결례를 주지 않았을까에 대해 염려를 하곤 했다. 남에 대한 배려는 종부들이 그녀의 삶 동안 지속적으로 해왔던 모습이고 이렇듯 가벼이 들러 불쑥 당신은 누구십니까 란 질문에도 몸 소 대답해 주신 행동의 답이었다. 어느 시골에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종부의 모습과 유난히도 닮아 있음을 느꼈고 우리들의 어머니 모습과 닮아 있었다.

시골에는 자주 버스가 오지 않는 정류장이 있다. 마을이 길에서 멀수록 마을 어귀까지 버스가 들어오고 또 회차를 할 수 있는 공간까지도 넉넉히 있는 정류장이 있다. 넓은 터에 작은 정류장이 잘 어울린다. 늙고 작아진 그녀들의 뒷모습이 마을과 잘 어울리는 것처럼.


2009년 7월의 여행을 2011년에 씀
2창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