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예술에서의 탐사와 탐구 - 이은정展
임 재 광
(미술평론가)
2009.2
유난히 을씨년스러웠던 겨울이 가고 있다. 매서운 경제 한파를 피부로 느끼며 지나온 겨울이다. 그러나 계절은 어김없이 순환하고 있으며 봄은 오고 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옷깃 사이로 스며드는 한기를 추스르며 거리로 나선다. 전시를 보고 작가를 만나는 일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 즐겁다.
<Dowsing - 두가지 탐사>라는 표제의 이은정 전시를 보았다. 이은정은 화선지에 수묵담채의 전통 한국화 기법을 고수하는 작가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전통적 재료와 기법에 의해 그려짐에도 매우 새로운 느낌을 준다.
이 새로운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이은정 그림의 새로운 느낌은 이미지의 독특함에서 온다. 평범한 여인의 얼굴을 독특한 느낌의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 이것이 이은정 그림의 특징이고 새로움이다. 이러한 표현방법은 그가 지속적인 탐사를 통해 찾아낸 것이다. 탐사 즉 다우징(Dowsing)은 이은정 작업의 방향이며 방법이다.
이공갤러리에서 있었던 이번전시에서 그는 두 갈래의 방향성을 갖는 탐사를 보여주었다. 하나는 화면의 ‘공간과 구조’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내용과 의미’에 관한 것이다.
먼저 1층에는 <접힌 여백>이라는 명제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보통 그림에서 주제가 되는 인물은 중앙에 크게 그리는 것이 보통인데 이 그림들에서는 한쪽 구석에 작게 배치되어있고 오히려 배경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배경은 접히고 주름 잡힌 줄무늬 또는 땡땡이 무늬 천으로 처리되어 있다. 따라서 이 그림들은 배경을 주제로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의 명제가 이상하다. 여백(餘白)은 사전적 의미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남은 빈자리”를 뜻한다. 그렇다면 이 그림에는 여백이 없다. 빈자리가 없이 꽉 차게 그림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을 여백으로 보아야 하는데 전통 한국화에서 배경은 보통 여백으로 비워 놓는다. 이은정 역시 이전의 인물그림에서 배경은 여백으로 비워 놓았었다. 어쨌든 여백이 접힌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예술에서는 이런 엉뚱함이 오히려 묘미를 준다. “접힌 여백”이라는 명제는 공간과 구조에 대한 관념을 깨는 언어적 장치이다. 명제가 주는 선물은 바로 이러한 언어유희의 즐거움이다.
2층에는 <흐릿한 초상>연작이 전시되어 있었다. 작가 본인에게는 <접힌 여백>이 새롭게 시도한 것이라서 애착이 있을지 모르지만 난 이 <흐릿한 초상>이야말로 이은정이 탐사를 통해 찾아낸 가장 가치 있는 광맥이라 생각한다.
집으로 배달된 청주 창작스튜디오에서의 전시 도록에서 유독 이 <흐릿한 초상> 그림이 눈길을 끌었다. 참으로 독특한 발상이다. 얼굴을 분명하게 그리지 않고 흐릿하게 그림으로해서 보는 사람들에게 상상의 여지를 넓혀준다. 보는 사람들은 그림 속의 얼굴을 보면서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기도 하고 기억마저도 흐릿한 어느 여인을 회상하기도 할 것이다.
<흐릿한 초상>은 온갖 이미지가 난무하여 경쟁적으로 강렬해지는 오늘날의 시각 환경에서 자신을 약화시킴으로 해서 오히려 돋보이는 역발상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빠르고 강함이 강조되는 세태에 반하여 느리고 약한 것을 추구하는 역발상에서 이은정 그림은 힘을 얻는 것이다.
이번에는 서양 지폐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초상을 그렸다. 지폐에 그려지는 인물은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 대부분 일정한 분야의 업적을 남긴 유명한 사람이다. 이은정은 그 인물들의 배경과 업적 등을 조사하여 나름대로의 특성을 잡아내었다. 이들의 초상에서 유의하여 볼 점은 눈의 색깔이다. 작가는 여인의 눈에 고유한 색깔을 사용함으로써 그 인물의 특성을 부여하였다.
이 서양 여인들 역시 얼굴을 흐릿하게 그렸는데 이는 인물의 이미지를 약하게 하여 관객에게 특정한 이미지를 강요하지 않고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라 한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일반적인 초상화와는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른 느낌’은 이은정 그림의 독자성이고 그림이 갖고 있는 힘이다.
또한 지폐속의 여인들은 지폐의 액수에 따라 가치화된 느낌을 주는데 그들은 지폐로부터 나오게 하여 자유를 주고자하는 여성주의적 관점이 포함되어있다. 그림의 내용과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작업이다.
이은정의 작업 전반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은 시각과 관점에 대한 관심이다. 그림을 보는 관람객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일까하는 배려와 관심이 엿보인다.
추상적 공간이 아닌 실재적 공간처리로 인한 시각적 변화를 꾀하는 것 그리고 강한 얼굴 이미지에 압도되지 않도록 흐릿하게 그리는 것은 관객에 대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관객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이는가를 고려하는 시각예술가의 면모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우징(Dowsing)은 보통 수맥찾기로 번역되지만 사실은 좀 더 범위가 넓다. 다우저(Dowser) 즉 탐사자들은 나일론이나 비단 줄에 배단 개암나무, · 마가목, · 버드나무의 가지나 Y자형의 금속막대 또는 추를 사용하여 물, 광물, 보물, 고고학적 유물, 사체(死體)와 같은 숨겨진 물질을 찾는다.
지구상의 생명체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찾는다. 생존을 위해 또는 진화와 발전을 위해 필요한 요소들을 갈구하고 있다. 그러나 도구를 이용하여 체계적으로 탐사를 벌이는 종족은 인류가 유일하리라.
미술가들은 끊임없는 탐사를 통해 의미와 개념을 확장한다. 그런 점에서 미술가들은 일종의 다우저들이다. 미술가들의 작업은 자신의 광맥을 찾기 위한 집요하고도 끈질긴 탐사의 과정이다.
이은정은 미술가들의 이러한 속성을 직설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Dowsing>은 2001년 첫 번째 개인전부터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명제다. 이 명제에서 볼 수 있듯이 이은정은 자신의 작업을 일종의 탐사활동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은정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탐사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찾기 위한 조형적 탐사작업이 바로 이은정의 작품세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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